이슈를 보는 창 - 인요한 박사
이인창 기자 tackle21@cch.tv
2012-04-03
오늘 이슈를 보는 창 인터뷰에서는 국내 최초로 특별귀화자로 선정되신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소장 인요한 박사를 모시고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소장님 안녕하십니까? Q. 대한민국 최초 특별 귀화허가를 받으셨습니다. 인 소장님의 어떤 활동을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건가요? 2005년도에 제가 훈장을 받았습니다. 사실 훈장도 가족들이 그동안 특히 우리 형님이 유진벨 재 단을 통해 이북을 도왔고, 그 이전에 제가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했고 그것이 알려져서 받은 것입니다. 사실 가족하고 형님 때문에 훈장을 받기는 과분했고요. 여하튼 그것이 조건이 돼서 요번에 특별귀화하게 됐습니다. Q. 소장님은 스스로 ‘순천 촌놈’이라고 하시는데요. 어린 시절은 보낸 대한민국, 소장님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제 기억이 제일 남는 것은 순천의 어린 시절입니다. 그때는 정말 어려웠어요. 다 초가집에서 살고요. 대한민국이 그 당시 순천에는 매곡동에 자랐는데, 매곡동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정확한 것 같구요. 굉장히 없는 가운데서도 정을 나누고 풍부하게 살았어요 어려웠지만 웃으면서 살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Q. 특별히 북한돕기에도 활발하게 참여하셨습니다. 그동안 어떤 지원을 해오셨습니까? 형님이 유진벨 재단을 95년도에 만들었는데요. 97년도에 의료로 전환을 했습니다. 동생이 의사이니까 스티브 형님이 네가 나서라 해서 어머님도 북한 모시고 갔습니다. 그 이후에 우리가 결핵 퇴치사업을 북한에서 하게 됐어요. 한동한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1965년도에 인구의 5%가 결핵환자였는데요 북한도 현재 그렇습니다. 결핵환자가 열양실조가 밀집된 곳에 살기 때문에 많이 늘어났고 지금도 심각하고 통일 전에는 가장 비용이 들어가는 보건 문제입니다. Q. 선교사 후대 4대손입니다. 린튼가는 어떤 선교를 했나요? 저희 집안은 1895년에 유진벨 선교사, 한국말로 배유지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1897년 유진벨 선교사가 처음으로 나주 갔다고 결국 목포에서 교육선교를 했어요. 정명하고 영흥학교 세우고. 그리고 1900년대 초에 광주로 넘어와서 숭일하고 수피아학교를 세웠습니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로 독신으로 1912년에 나오셔서 기전하고 신흥학교. 할아버지 할머니가 초대교장으로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농촌에 교회 세우는 데 전념을 하셨구요. 1954년도에 순천에 파송됐고, 어머니는 6남매를 키우면서, 어머니는 의료인은 아니었지만, 결핵퇴치사업을 50년 동안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순천기독결핵재활원을 집안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Q. 지금의 한국교회와 선교를 향한 객관적 조언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말씀 해주신다면? 할아버지 말씀을 빌리자면 한국 목사님들은 야고보서를 많이 봐야 된다. 제가 말하기는 자격이 없지만 할아버지 말을 빌려서 실천이 좀 문제인 것 같아요. 소외된 이웃들이 굉장히 힘들게 지내고 있는데, 교회가 대형화되고 교인들이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한국교회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Q. 어떤 한국인으로 앞으로 살기 원하십니까? 이젠 국적을 취득하게 돼서 고민이 많아요. 아마 제가 해야될 것은 의료 관광을 대한민국이 많이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산업입니다. 한국 의사들이 손재주가 좋고 아주 환자들 치료를 잘해요 시술 수술을 아주 잘 합니다 그것을 널리 알리고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 다음에 은퇴한 다음에는 12년 남았는데요. 순천 내려가서 어렸을 때 고향 친구들하고 인생을 거기서 마치는데, 여기서 뼈를 묻히고 전라도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 그런 마음입니다. 오늘 이슈를 보는 창 인터뷰에서는 인요한 소장 만나 이야기 들어봤습니다. 소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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